프로그래밍이 너무 좋다며 학교 공부는 다 제쳐두고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속을 썩이는 학생들을 가끔 봅니다. 개발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엔 어느 한 가지에 푹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 오타쿠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은근히 많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죠. 게다가 프로그래밍이나 웹디자인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전문대(폴리텍)들은 일반적인 인문사회계/자연계 4년제 대학보다 입시의 문턱이 낮기 때문에, 공부를 좀 손해보더라도 프로그래밍에 집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이런 곳에서는 개발은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개발에 대한 열정을 오랫동안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기초를 튼튼하게 닦아 주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프로그래머에게는 아래의 3가지 실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1. 국어

 

아무리 프로그래밍을 잘 하면 뭐하나요? 다른 사람들에게 내 프로그램을 알리고, 피드백을 받아서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클라이언트나 사용자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히 전달해야 할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조리있게 설명하고, 드라마틱한 홍보가 필요한 부분은 적당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클라이언트나 사용자, 함께 일하는 개발자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자신의 생각을 오해 없이 전달하면서도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개발자는 PHP, SQL, 자바스크립트 등 컴퓨터 언어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한국어의 전문가 역시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컴퓨터 언어는 능숙하게 다루지만 주변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빛을 발하지 못하곤 합니다.

 

2. 영어

 

아쉽게도 한국어는 IT 업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가 아닙니다. 컴퓨터라는 것 자체가 미국과 영국에서 발명된 것이고, 현대의 프로그래밍 언어도 대부분 영어 문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최신 동향과 참고자료도 대부분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생산됩니다.

 

한글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다며 지난 20여년간 여러 개발자와 기업들이 뻘짓을 했지만, 정부에서 눈먼 돈을 조금 타내는 데 성공했을 뿐 세계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했습니다. 한글만 쓰며 살고 싶다면 우선 대한민국이 세계를 정복할 방법부터 찾아보세요.

 

얼마 전 삼성 오픈소스 컨퍼런스에 깜짝출연한 "리눅스의 아버지" 리누스 토발즈는 스웨덴계 핀란드인이지만 리눅스는 처음부터 영어로 개발했고, 스웨덴어나 핀란드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는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좋든 싫든 영어는 IT 업계의 공용어이고, 영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최신 기술을 배우기도 쉽고 자신이 개발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3. 수학

 

미적분은 못 해도 됩니다. 그러나 너무 일찍부터 "수포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컴퓨터는 수학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업종이 아니라면 온갖 방정식을 외울 필요는 없지만, 수학에서 사용되는 기본적인 개념만은 완벽하게 익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새로 만드는 디자인 폭이 1280픽셀이고 이것을 12개의 컬럼으로 나누는데, 각 컬럼 사이에는 20픽셀씩의 여백이 있어야 하고 좌우 끝 부분에는 10픽셀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면 각 컬럼의 폭은 몇 픽셀인가요? 사실 이건 초등학교 수준의 계산 문제입니다. 중요한 건, 이걸 보고 쫄아선 안 된다는 거죠. 복잡한 수학 문제를 보고 겁내는 사람은 나중에 좀 까다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때도 쫄아버립니다. 쫄지 않는 법을 배우세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세요. 외국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피보나치 수열 계산이나 삼육구삼육구 같은 단순한 숫자게임을 숙제로 내주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결론: 우리나라 교육체계가 아무리 썩었더라도 괜히 국·영·수를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

 

물론 이런 것들을 반드시 학교에서, 그것도 입시 준비를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입시에 쓰는 국·영·수와 위에서 강조한 국·영·수는 성격이 약간... 아니, 많이 다르죠. 그래도 기본적인 교양을 너무 무시하지는 말라는 의미로 일부러 국·영·수 카테고리에 맞추어 써보았습니다. 입시 준비가 아니라도 문학 작품도 읽어보고 영어 단어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다른 거 모두 포기하고 프로그래밍만 열심히 한다고 훌륭한 개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프로그램이란 결국 사람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니,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나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가 대학을 중퇴하고 사업에 성공했다고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이 두 사람은 하버드를 중퇴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버드를 중퇴하려면 우선 하버드에 합격을 해야죠. 십대 때부터 상당한 실력과 교양을 쌓은 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학교나 중퇴한다고 빌 게이츠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저는 고등학교도 중퇴해 봤고, 대학도 그만두고 편입한 전과(?)가 있네요. ㅋㅋ

 

기진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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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tHub @kijin 사람을 위한 인터넷 생태계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XE의 새 이름, 라이믹스(Rhymix)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픈소스 도로명주소 검색서버 및 API Postcodify를 개발, 운영중입니다.
국내외 서버 및 클라우드서버 세팅, 이전, 튜닝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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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이 되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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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교과과정에서 배우는 국영수는 도움이 안되는 게 문제 아닐까요 ...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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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영어 교육과정은 문법과 독해 위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실제로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영어 블로그나 프로그래밍 매뉴얼을 이해하는 데 회화 실력은 필요없잖아요? 독해만 할 수 있으면 되죠. 프로그래밍만큼 "문법" 위주로 돌아가는 분야도 별로 없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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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아~~끔

    아!! 하면서 떠오를때가 있지 않나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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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정도 공감은 합니다..;ㅁ;
    내가 말하고 싶은걸 재대로 PR할 수 있어야 내의견이 반영되고 안되고도 들어가기 때문에 글쓰는 요령이 필요한거죠.
    어떻게 보면, 국어전체분야가 아닌 글짓기 분야를 좀 더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개발자는 될수 있어도, 기술만 뛰어나서는 개발자를 다루는 위 세가지가 부족한 개발자 매니저급은 못되더군요. 프로젝트를 하면서 눈동냥하면서 본 결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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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정말 이리저리 둘러보면 개발자보다 코더가 되고싶은 사람들이 더 많은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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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요... 건축가가 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건설현장 일용직이 꿈이라고들 하는 건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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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저는 건축과 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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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어느 분야에서나 중요한거 같아요 :)
    수학은 수학이기도 하지만 논리력을 키우는 공부기도 한 것 같아요. 과학과 함께요.
  • ?
    영어교육전공인데 자녀분들이 영어 공부하고자 한다면 한국에서는 아이패드 하나 사주고 구글앱 하나 깔아주고 매월 나가는 사교육비 적립했다가 고등학교 올라갈 때 그 돈으로 외국보내면 가장 경제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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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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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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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휘력 쌓는게 결국 남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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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이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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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로 돌어가 뻘짓좀 하고 싶네요...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프로그램 = "칼" 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은 칼잡이가 아니라, 세프, 의사, 이런 사람들입니다. 요리를 배워야지 칼쓰는 법만 배우면 안되는 이유지요. 주방보조밖에 못합니다. 프로그램 공부하려는 분들이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나 공부 그만두고 대학 그만두고 칼쓰는 법 배우려구요"... 물론 세프가 칼을 못쓰면 곤란하죠. 의사가 칼잡기 두려워해서는 곤란하죠. 그건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 붙일 진짜 본인만의 전문지식이 있어야합니다.